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지카타 토시조 (문단 편집) === 신센구미 활동 === 1863년, 히지카타와 곤도 이사미가 에도의 로시구미에 합류하여, 교토 미부에 도착하여 미부로시구미로 남았고, 나머지는 에도로 돌아갔다. 이후, 미부로시구미가 신센구미로 개명하면서 곤도와 [[세리자와 카모]], 니이미 니시키(新見錦) 등 두 사람이 공동의 리더가 되었고, 히지카타는 부대표 중 한 명이 되었다. 신센구미는 [[아이즈 번]]의 [[다이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밑에서 개혁파에 대항하는 특수 경찰로 교토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세리자와와 니이미는 교토의 상인들과 싸우고, 술을 마시며 행패부리며 돈을 갈취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신센구미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미부의 늑대(壬生狼)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히지카타는 이러한 문제에서 니이미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찾아 10월 19일에 [[할복]] 자살을 하도록 명령했다. 10월 30일[* 10월 28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밤에 히지카타와 선택된 신센구미 일원들은 야기 겐노죠의 집에 들어가 세리자와와 그의 정부 오우메를 암살한다. 그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히라마 주스케가 그날 밤 도망친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후 곤도 이사미는 신센구미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고, [[야마나미 케이스케]]가 부사령관이 되었다. [[1864년]]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 당시, 신센구미는 [[아이즈 번]]의 [[마쓰다이라 카타모리]]의 명을 받아 [[조슈 번]]의 뜻을 받은 존양파들의 탐색에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죠슈번의 [[첩자]]가 되어 활동하고 있던 상인 후루타카 슌타로(古高俊太郎)를 포박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TQGdxMjtscM)]}}} || || {{{#ffffff '''이케다야 사건''' }}} || 히지카타는 후루타카 슌타로를 미부 둔소(壬生屯所)에서 잔혹하게 고문을 했고 후루타카는 교토 거리에 [[방화]]해 천황을 조슈 번에 빼앗고 떠난다는 계획이 있음을 [[자백]]했다. 또한 이 계획에 관해 밀의를 하기 위해 조슈 번의 낭인들이 집결한다는 정보를 파악한 신센구미는 이 이야기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가 있는 아이즈번에 통보한다. 그러나 아이즈번의 움직임이 느렸기 때문에 신센구미는 곤도대와 히지카타대에서 분담을 하여 독자적으로 탐색을 개시했다. 그리고 곤도대가 산죠코바시 여관 이케다야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낭인들을 발견한다. 20명이 넘는 낭인들을 단 4명이 베었다. 뒤늦게 도착한 히지카타대는 이미 전투 중이던 곤도대를 엄호하고 현장으로 달려간 아이즈번의 번병들을 견제해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러한 히지카타의 관리력도 효과를 발휘해, 신센구미는 교토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신센구미의 인지도는 단번에 올라가게 된다. 1865년 2월 3일(음력 1월 8일) 젠자이야 사건(ぜんざい屋事件) 이후 야마나미 케이스케는 탈영자에 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신센구미를 떠나려 했다. 그 결과, 1865년 3월 20일(음력 2월 23일) 오키타 소지와 함께 가이사쿠닌으로 할복을 명했고[* 총장인 야마나미 케이스케도 탈주하자 할복을 명해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려졌으나 친했다는 설도 있다.], 히지카타가 부장을 맡게 된다. 1867년에는 곤도를 암살하려던 [[이토 카시타로]]를 [[사이토 하지메]]를 보내서 막고 [[토도 헤이스케]]도 암살하였다. 당시 히지카타 토시조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험할 신센구미에서의 위치 때문에, 약혼했던 오코토와의 결혼을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는 후에 많은 연인을 두었지만, 그들 중 누구와도 결혼 약속을 하지 않았다. 부장 자리에 오른 히지카타는 치안 유지에 힘을 썼다. 감찰이나 조근 등 직무 별로 조직이 만들어졌다. 국장은 곤도 이사미지만 실제 지휘명령은 부장인 토시조가 하였다. 신센구미의 총대장은 곤도 이사미지만, 실제로 조직을 키운 인물은 히지카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곤도는 신센구미의 리더이고, 히지카타는 실제로 조직을 통제하는 또 다른 리더라고 평하기도 한다. 당시 신센구미는 140명으로 늘어났는데, [[에도 막부]]가 멸망할 경우 생계를 위협받는 농민과 상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교토 내에서 신센구미가 정한 규제는 엄격했고 히지카타는 이를 집행하는 데 있어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어 그의 별명은 "귀신 부장(鬼の副長)"이 된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침착하고 예리하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 번개처럼 빠릅니다. 곤도는 실수하지 않습니다. 모두 토시조의 존재 때문입니다. >---- >― 마츠모토 료준[* 신센구미와 가깝게 지낸 [[의사]]다.] (松本良順)[[https://baike.baidu.com/item/%E5%9C%9F%E6%96%B9%E5%B2%81%E4%B8%89/1989118|#]] 신센구미 내부에서도 히지카타에 의해 규제가 엄격히 시행되었다. 여느 때처럼 탈영병들과 배신자들은 할복을 시켰다고 한다. 국중법도(局中法度)를 고안하고 법을 어기면 동료도 서슴지 않고 베어 냉혹한 이미지로 악명 높았는데, 신센구미 내부에서는 언제나 신센구미의 규율을 대원들에게 엄수하도록 하여, 규율을 깬 대원에 대해서는 할복을 명하였고 대원으로부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신센구미 대원 사망원인 1위는 할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에는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를 먹은 탓인지 사기를 올리기 위한 계산상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확실히 엄격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틀림없으나 국중법도는 후세의 창작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히지카타 토시조의 후손들이 세운 히지카타 토시조 자료관에서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 '실제로 히지카타가 정한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https://twitter.com/toshizoofficial/status/1396277421549101063|#]] 히지카타는 1867년 막부의 하사받은 성씨인 나이토와 세습받은 이름인 하야토인 '나이토 하야토'라는 가명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곤도가 [[보신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 처형된 후 원래 이름으로 되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